제1차 나카소네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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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은 1982년 11월 27일에 발족한 자유민주당 단독 내각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록히드 사건 연루자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았으며, 다나카의 영향력으로 인해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요 정책으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40억 달러의 경제 협력 지원을 합의했으며,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어반 르네상스 계획을 추진하여 도심 지역의 용적률을 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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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나카소네 내각은 자유민주당의 중의원 총선거 참패 후 신자유클럽과의 연립정권으로 출범하여 자민당 단독정권을 종식시키고, 행정개혁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논란, 그리고 한일 관계에서 경제 협력과 과거사 문제라는 과제를 남겼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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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나카소네 내각 | |
---|---|
기본 정보 | |
![]() | |
내각 번호 | 71대 |
관할 | 일본 |
성립일 | 1982년 11월 27일 |
해산일 | 1983년 12월 27일 |
국가 원수 직함 | 천황 |
국가 원수 | 쇼와 |
정부 수반 직함 | 내각총리대신 |
정부 수반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정당 | 자유민주당 |
의회 현황 | 하원 다수당 정부 |
선거 | 제1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1983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83년) |
이전 내각 | 스즈키 젠코 내각 (개조) |
다음 내각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
정치 | |
여당 | 자유민주당 |
야당 |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주사회당 일본공산당 |
해산 | 1983년 11월 28일 (다나카 판결 해산) |
참고 자료 | |
수상 관저 | 제7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역대 내각 |
각료 명단 | 내각 각료 명단 |
2. 성립 배경
1983년 1월,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책인 '어번 르네상스 계획'을 세워 도심부(특히 도쿄 23구 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했다. 이것은 훗날 지가 상승 등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면서 버블 경기의 토대를 만들어 나가게 됐다.[11]
2. 1. 록히드 사건과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
이 내각은 자유민주당 단독 내각이었다. 나카소네는 록히드 사건의 피고인으로 규탄받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와 후원으로 정권을 잡았다. 사회민주연합의 나라자키 야노스케 등은 "나카소네 내각 위에 '밭 전(田)'자를 붙여 '''다나카소네 내각'''(田中曽根内閣일본어)이라고 비판했다.[6]1983년 1월, 나카소네는 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7]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8][9] 총 40억달러의 경제 협력 지원에 합의했다.[10] 이후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실형 판결이 내려졌고, 그해 12월에 치른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석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3. 주요 정책
1983년 나카소네는 연설에서 "전후사의 전환점"을 강조했다. 같은 해 12월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의석수가 줄었으며, 세토야마 미쓰오 문부대신, 오노 아키라 노동대신, 타니가와 가즈호 방위청 장관 등 현직 각료 3명이 낙선했다.
3. 1. 한일 관계 개선
1983년 1월, 나카소네는 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7]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8][9] 이 회담에서 총 400억달러의 경제 협력 지원에 합의했다.[10] 같은 해, 나카소네는 방한하여 제1차 교과서 문제에 결착을 짓는 동시에 "한일 신시대"를 선언했다.3. 2. 어반 르네상스 계획과 경제 정책
1983년 1월, 나카소네 내각은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책인 '어번 르네상스 계획'을 시행하여, 도심부(특히 도쿄 23구 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했다. 이는 훗날 지가 상승 등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면서 버블 경기의 토대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11]4. 내각 구성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각료, 정무 차관으로 구성되었다.[1]
1982년 11월 30일에 임명된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나카소네 야스히로 | |
법무대신 | 하타노 아키라 | |
외무대신 | 아베 신타로 | |
대장대신 | 다케시타 노보루 | |
문부대신 | 세토야마 미쓰오 | |
후생대신 | 하야시 요시로 | |
농림수산대신 | 가네코 이와조 | |
통상산업대신 | 야마나카 사다노리 | 1983년 6월 10일 사임 |
우노 소스케 | 1983년 6월 10일 임명 | |
운수대신 | 하세가와 다카시 | |
우정대신 | 히가키 도쿠타로 | |
노동대신 | 오노 아키라 | |
건설대신 | 우쓰미 히데오 | |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야마모토 사치오 | |
내각관방장관 | 고토다 마사하루 | |
총리부 총무장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 니와 효스케 | |
행정관리청 장관 | 사이토 구니키치 | |
국토청 장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가토 무쓰키 | |
방위청 장관 | 다니카와 가즈오 | |
경제기획청 장관 | 시오자키 준 | |
과학기술청 장관 | 야스다 다카아키 | |
환경청 장관 | 가지키 마타조 | |
내각법제국 장관 | 쓰노다 레이지로 | |
내각관방부장관(정무) | 후지나미 다카오 | |
내각관방부장관(사무) | 후지모리 쇼이치 | |
총리부 총무부장관(정무) | 후카야 다카시 | |
총리부 총무부장관(사무) | 야마지 스스무 |
같은 날 임명된 정무 차관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
법무 정무 차관 | 마루야마 마사야 / 나오 료코 | 1983년 7월 12일 ~ |
외무 정무 차관 | 이시카와 요조 | |
대장 정무 차관 | 쓰카하라 슌페이 · 엔도 마사오 | |
문부 정무 차관 | 오쓰카 유지 | |
후생 정무 차관 | 이나가키 지쓰오 | |
농림 수산 정무 차관 | 나라하시 스스무, 스즈키 쇼이치 / 다시로 유키오 | 1983년 7월 12일 ~ |
통상 산업 정무 차관 | 와타나베 히데오 · 마에다 이사오 | |
운수 정무 차관 | 세키야 가쓰쓰구 | |
우정 정무 차관 | 도이다 사부로 | |
노동 정무 차관 | 아이치 가즈오 | |
건설 정무 차관 | 나카무라 기시로 | |
자치 정무 차관 | 사노 가키치 | |
행정 관리 정무 차관 | 기쿠치 후쿠지로 | |
홋카이도 개발 정무 차관 | 이와모토 마사미쓰 | |
방위 정무 차관 | 하야시 다이칸 | |
경제 기획 정무 차관 | 쓰지 히데오 | |
과학 기술 정무 차관 | 이와카미 니로 | |
환경 정무 차관 | 후쿠시마 조지 | |
오키나와 개발 정무 차관 | 마쓰오 간페이 | |
국토 정무 차관 | 다모 다카히사 |
4. 1. 각료 명단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일본어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1]직책 | 이름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나카소네 야스히로 | |
법무대신 | 하타노 아키라 | |
외무대신 | 아베 신타로 | |
대장대신 | 다케시타 노보루 | |
문부대신 | 세토야마 미쓰오 | |
후생대신 | 하야시 요시로 | |
농림수산대신 | 가네코 이와조 | |
통상산업대신 | 야마나카 사다노리 | 1983년 6월 10일 사임 |
우노 소스케 | 1983년 6월 10일 임명 | |
운수대신 | 하세가와 다카시 | |
우정대신 | 히가키 도쿠타로 | |
노동대신 | 오노 아키라 | |
건설대신 | 우쓰미 히데오 | |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야마모토 사치오 | |
내각관방장관 | 고토다 마사하루 | |
총리부 총무장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 니와 효스케 | |
행정관리청 장관 | 사이토 구니키치 | |
국토청 장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가토 무쓰키 | |
방위청 장관 | 다니카와 가즈오 | |
경제기획청 장관 | 시오자키 준 | |
과학기술청 장관 | 야스다 다카아키 | |
환경청 장관 | 가지키 마타조 | |
내각법제국 장관 | 쓰노다 레이지로 | |
내각관방부장관(정무) | 후지나미 다카오 | |
내각관방부장관(사무) | 후지모리 쇼이치 | |
총리부 총무부장관(정무) | 후카야 다카시 | |
총리부 총무부장관(사무) | 야마지 스스무 |
4. 2. 정무 차관
1982년 11월 30일일본어에 임명되었다.직책 | 이름 | 비고 |
---|---|---|
법무 정무 차관 | 마루야마 마사야 / 나오 료코 | 1983년 7월 12일 ~ |
외무 정무 차관 | 이시카와 요조 | |
대장 정무 차관 | 쓰카하라 슌페이 · 엔도 마사오 | |
문부 정무 차관 | 오쓰카 유지 | |
후생 정무 차관 | 이나가키 지쓰오 | |
농림 수산 정무 차관 | 나라하시 스스무 스즈키 쇼이치 / 다시로 유키오 | 1983년 7월 12일 ~ |
통상 산업 정무 차관 | 와타나베 히데오 · 마에다 이사오 | |
운수 정무 차관 | 세키야 가쓰쓰구 | |
우정 정무 차관 | 도이다 사부로 | |
노동 정무 차관 | 아이치 가즈오 | |
건설 정무 차관 | 나카무라 기시로 | |
자치 정무 차관 | 사노 가키치 | |
행정 관리 정무 차관 | 기쿠치 후쿠지로 | |
홋카이도 개발 정무 차관 | 이와모토 마사미쓰 | |
방위 정무 차관 | 하야시 다이칸 | |
경제 기획 정무 차관 | 쓰지 히데오 | |
과학 기술 정무 차관 | 이와카미 니로 | |
환경 정무 차관 | 후쿠시마 조지 | |
오키나와 개발 정무 차관 | 마쓰오 간페이 | |
국토 정무 차관 | 다모 다카히사 |
5. 평가 및 영향
나카소네 내각은 자유민주당 단독 내각이었다. 나카소네는 록히드 사건으로 비판받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사회민주연합의 나라자키 야노스케 등은 "나카소네 내각 위에 '밭 전(田)'자를 붙여 '''다나카소네 내각'''(田中曽根内閣일본어)”이라고 비판했다.[6] 이전의 오히라 내각, 스즈키 젠코 내각은 "그림자 내각"이라고 불렸지만, 다나카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의미에서 "'''직각 내각'''"이라고도 불렸다.
1983년 1월, 나카소네는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7]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8][9] 총 40억달러 규모의 경제 협력 지원에 합의했다.[10] 같은 해, 제1차 교과서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함께 "한일 신시대"를 선언했다.
같은 해 1월,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 정책인 '어번 르네상스 계획'을 시작하여 도심부(특히 도쿄 23구 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했다. 이는 훗날 지가 상승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어 버블 경기의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11]
그해 12월에 치러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실형 판결이 내려진 영향으로 의석 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는 세토야마 미쓰오 문부대신, 오노 아키라 노동대신, 타니가와 가즈호 방위청 장관 등 현직 각료 3명이 낙선했다.
참조
[1]
웹사이트
第71代 中曽根 康弘|歴代内閣
https://www.kantei.g[...]
Prime Minister's Official Residence
2023-10-08
[2]
문서
[3]
문서
[4]
서적
新・自民党戦国史
朝日ソノラマ
[5]
서적
千昌夫の教訓
小学館文庫
[6]
문서
[7]
뉴스
韓·日頂上 靑瓦臺서 첫會談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3-01-11
[8]
뉴스
韓半島安定 日안정에 긴요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3-01-12
[9]
뉴스
日, 韓國安定긴요성 同意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3-01-12
[10]
뉴스
韓·日共同聲明 〈全文〉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3-01-12
[11]
서적
센 마사오의 교훈
쇼가쿠칸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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